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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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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9년 8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1989년 7월 참의원 선거의 참패로 우노 소스케 총재가 사임하면서 치러졌다. 리크루트 사건의 영향으로 주요 파벌 수장들의 출마가 제한된 가운데, 가이후 도시키가 경세회 등 주요 파벌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하야시 요시로와 이시하라 신타로도 출마했으나, 가이후가 279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번 선거는 텔레비전을 통해 후보자들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등 국민과의 소통을 시도한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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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선거 개요
선거 이름1989년 8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국기 이미지
선거 유형총재 선거
진행 여부아니오
이전 선거1989년 6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89년 6월
다음 선거199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91년
선거일1989년 8월 8일
선출 제도양의원 총회에 의한 선출
유권자 수당 소속 중의원 의원: 295
투표 결과
후보 1가이후 도시키
득표수 1279
후보 2하야시 요시로
득표수 2120
후보 3이시하라 신타로
득표수 348
총재
선거 전 총재우노 소스케
선거 후 총재가이후 도시키

2. 배경

1989년 7월 24일에 치러진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큰 패배를 겪었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우노 소스케 총재는 취임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1] 이에 따라 새로운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자민당 내부는 리크루트 사건의 여파로 주요 파벌의 수장들이었던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이 사실상 선거에 출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 1. 리크루트 사건의 영향

리크루트 사건은 당시 자유민주당을 뒤흔든 대형 정치 스캔들로, 이 사건에 연루된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와 같은 각 파벌의 수장급 유력 정치인들은 사실상 총재 선거 출마가 봉쇄되었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세회(다케시타파)는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후보를 물색했고, 전 문부상이었던 가이후 도시키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가이후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선 횟수가 많아, 고모토 도시오와 같은 고령 정치인들이 직면할 수 있는 세대 교체 요구에서 자유로웠고, 하시모토 류타로 등 소장파 의원들이 우려했던 다케시타 노보루나 아베 같은 중진 의원들의 정치적 영향력 감소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인물로 평가받았다.

경세회를 비롯해 청화회(아베파)와 신정책연구회(고모토파)가 가이후 지지를 선언하면서 그의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선거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목요 클럽(니카이도 그룹) 소속의 하야시 요시로굉지회(미야자와파)의 지지를 받아 출마했고, 청화회에서 제명된 가메이 시즈카히라누마 다케오, 소노다 히로유키와 함께 같은 청화회 소속의 이시하라 신타로를 독자적으로 옹립했다. 다만 이시하라 신타로는 후보 추천인을 모으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이 총재 선거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후보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정책 토론회를 도입하여 국민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보인 선거이기도 했다.

3. 선거 과정

1989년 7월 24일 제15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며 참패하자, 우노 소스케 총재는 취임 두 달 만에 사퇴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자민당을 강타한 리크루트 사건의 여파로, 사건에 연루된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 각 파벌의 유력 주자들은 사실상 출마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후보를 모색했고, 전 문부대신 가이후 도시키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가이후는 "시계 바늘을 되돌리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선택되었는데, 이는 고모토 도시오와 같은 고령 정치인처럼 세대 교체 요구에 역행하지도 않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같은 젊은 정치인처럼 세대 교체를 너무 앞당겨 다케시타 노보루나 아베 신타로 같은 중진들의 입지를 위협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였다. 즉, 나이에 비해 중의원 당선 횟수가 많았던 가이후는 파벌 간의 이해관계를 절충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다케시타파, 아베파, 고모토파의 3개 파벌이 연합하여 가이후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선거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니카이도 그룹 소속의 하야시 요시로미야자와파의 지원을 받아 출마했고, 아베파에서 제명된 가메이 시즈카 등은 가이후와 하야시 모두를 지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아베파의 이시하라 신타로를 후보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시하라는 후보 등록에 필요한 추천인 20명을 모으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1]

한편, 이번 총재 선거부터는 후보자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등,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3. 1. 후보자

하야시 요시로가이후 도시키이시하라 신타로
--
가이후 도시키 (1989년)
--
중의원 의원 (7선, 야마구치현 제1구)
후생대신 (1982-1983)
당 경리국장
중의원 의원 (10선, 아이치현 제3구)
문부대신 (1985-1986)
당 국회대책위원장 (1976)
중의원 의원 (6선, 도쿄도 제2구)
운수대신 (1987-1988)
목요 클럽 (니카이도 그룹)반초 정책연구소 (고모토파)청화회 (아베파)
야마구치현아이치현도쿄도


4. 선거 결과

1989년 8월 8일에 치러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결과, 가이후 도시키가 총 유효표 447표 중 279표(62.42%)를 얻어 당선되었다. 하야시 요시로는 120표(26.85%), 이시하라 신타로는 48표(10.74%)를 득표했다.

'''1989년 8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결과''' (1989년 8월 8일 시행)
후보득표수득표율
가이후 도시키27962.42%
하야시 요시로12026.85%
이시하라 신타로4810.74%
총계447100.0%
유효 투표수 (유효율)44799.11%
무효표·백표수 (무효율)40.89%
투표자수 (투표율)451100.0%
기권자수 (기권율)00.00%
유권자수451100.0%


5. 선거의 특징과 의의

이 선거는 자유민주당을 뒤흔든 리크루트 사건의 여파 속에서 치러졌다. 이 사건에 연루된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와 같은 주요 파벌의 수장들이 사실상 입후보할 수 없게 되면서[1], 기존의 파벌 정치 구도에 변화가 불가피했고 세대교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케시타파 등 주요 파벌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도 세대교체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물로 가이후 도시키를 선택하여 옹립했다.[1] 비록 하야시 요시로이시하라 신타로 등 다른 후보들이 출마하며 파벌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드러나기도 했지만[1], 선거 과정에서는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이 선거부터는 처음으로 후보자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총재 선거와 국민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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